
공항이나 기차역, 낯선 쇼핑몰에서 우리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가지 그림을 찾습니다. 바로 파란색 바지 모양의 사람과 빨간색 치마 모양의 사람이 그려진, 화장실을 나타내는 그림문자이죠.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인류 공통의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당연하게 여겨지는 ‘치마와 바지’ 디자인이 사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계적인 약속은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많아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잦아진 1960년대와 70년대에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글자만이 존재했던 시절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공중화장실 앞에는 그림 대신 글자만이 덩그러니 쓰여 있었습니다. ‘신사(Gentlemen)’, ‘숙녀(Ladies)’, 혹은 각 나라의 언어로 남녀를 구분하는 단어들이 전부였죠. 자국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이때부터 문제는 시작됩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해외여행이 점차 대중화되고, 올림픽이나 박람회 같은 대규모 국제 행사가 열리면서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미국 공항에,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이 파리역에 내렸을 때, 화장실 문 앞에 쓰인 글자만으로는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지 도통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불편함이 바로 새로운 소통 방식의 필요성을 일깨운 출발점이었습니다.
올림픽이 쏘아 올린 그림 언어


이러한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가 시작된 곳은 바로 1964년 도쿄 올림픽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방문객들이 언어 문제로 불편을 겪지 않도록, 글자 대신 그림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픽토그램(Pictogram)’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도입했습니다.
경기 종목을 나타내는 그림부터 식당, 안내소, 그리고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간단하고 명료한 그림문자는 누가 보더라도 그 의미를 즉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성공적인 시도는 전 세계에 큰 영감을 주었고, ‘그림’이야말로 국경과 인종을 넘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공용어라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치마와 바지’ 디자인의 공식적인 탄생


도쿄 올림픽의 성공 이후, 전 세계적으로 픽토그램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화장실 그림문자의 직접적인 조상이 탄생한 것은 1974년 미국에서였습니다. 당시 미국 그래픽디자인협회(AIGA)와 미국 교통부(DOT)가 협력하여 공공시설 안내를 위한 50가지 표준 픽토그램을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때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단순한 형태로 남성과 여성을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가장 보편적이고 직관적인 해결책이 바로 ‘옷차림’이었습니다. 남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바지’의 형태를, 여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치마(드레스)’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표현한 디자인이 마침내 세상에 공개된 것입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간 보편적인 약속


AIGA와 미국 교통부가 제시한 이 ‘치마와 바지’ 디자인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핵심적인 특징만을 잡아낸 이 간단한 그림은 그 어떤 설명 없이도 완벽하게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이 디자인의 우수성은 곧 국제표준화기구(ISO) 등 여러 국제기구에서도 인정받으며 전 세계 공항, 기차역, 공공건물의 표준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단순한 그림은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각적 소통 사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글자를 읽을 필요도,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 그림 하나만으로 안심하고 화장실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그리고 새로운 고민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 보편적인 약속에도 새로운 질문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남성은 바지, 여성은 치마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과연 오늘날의 다양한 성 정체성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느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마를 입는 남성도, 바지를 즐겨 입는 여성도 있으며, 이 두 가지 틀에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최근에는 치마와 바지를 반반씩 합친 모양이나, 성별 구분 없이 사람 모양 하나만 그려 넣은 ‘모두의 화장실(All Gender Restroom)’ 픽토그램도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장 보편적이라 믿었던 화장실 그림문자의 변화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거울과도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정확히 누가 처음 디자인했나요?
A. 특정 한 명의 디자이너를 꼽기는 어렵습니다. 1974년 미국 그래픽디자인협회(AIGA)에서 여러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미국 교통부와 협력하여 공공 픽토그램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현재의 화장실 픽토그램은 이 위원회의 집단적인 창작 결과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Q.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모양을 쓰기도 하나요?
A. 네, 그렇습니다. ‘치마와 바지’ 디자인이 가장 보편적이긴 하지만, 문화권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남성을 삼각형(▲), 여성을 원(●)으로 표현하거나, 보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픽토그램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Q.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나요?
A. 우리나라 역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기준에 맞춘 픽토그램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치마와 바지’ 형태의 화장실 픽토그램이 전국 공공시설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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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및 도움이 되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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